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트남 공화국 (문단 편집) == 멸망 후 숙청 == 대다수 공산 국가들처럼 매우 잔혹한 [[숙청]]이 동반되었다. 1975년부터 10년간 [[인민재판|사법적 절차 없이]] 처형된 자들만 최소 65,000명에서 최대 10만 명 정도라고 한다. [[http://jim.com/repression.htm|미국의 연구자가 1990년에 발표한 논문이며, 굉장히 많이 인용된다]]. (당시 남북 베트남의 인구는 1973년 기준으로 북쪽이 2,393만, 남쪽이 1,937만). 사법적 절차를 거쳐 처형된 자들의 수까지 생각하면 더 많다. 남베트남에서 근무했던 군인, 공무원이 [[세뇌|재교육]]을 받은 것은 물론이고, 양민학살이나 심각한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관리나 지주 대부분도 재교육 캠프에 들어갔다가 1980년대에 들어서야 석방되었고, 이 숫자는 100만명 정도 된다. 다만 공산정권은 특별히 [[베트콩]]에게 잔혹행위를 하지 않았거나 부패 혐의가 없는 남베트남 고위 관리들은 해외로 [[망명]]하도록 허가해주기도 했다. 물론 망명 간 사람들은 그냥 맨몸으로 추방당한 것과 같았기에, 미리 재산을 빼돌린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매우 빈곤하게 살았다. [[남베트남 공화국|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들은 [[베트남 인민군|북베트남군]]에서 남파한 인력이므로 애초에 숙청 대상이 아닌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베트콩(정부)은 남파된 북베트남군+자생적 반정부주의자(소위 민족주의자)의 공생조직이었으므로, 남베트남이 패망할 무렵부터 베트콩은 서서히 공생조직에서 북베트남군 일색으로 교체되어 간다. 이는 베트콩 정부에서 사법부장으로 활동했던 민족주의자 계열의 반정부 지식인이 직접 목격한 것으로 얼마 전까지 남베트남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됐던 부대가 머지않아 다시 봤더니 온통 북베트남인(군)으로 채워져 있었고, 북베트남군 [[정치장교]]가 통제하고 있더라는 증언을 했다. 베트콩들 역시 [[1968년]] 일어난 [[구정 대공세]]로 인해 대부분의 간부들이 [[남베트남군]]과 [[미군]]에 의해 토벌당했고 살아남은 민족주의 계열 간부들은 거의 없었고 남은건 남파된 북베트남 정치장교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피해를 봤다면 민족주의 세력이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이들은 남베트남의 패망이 유력해질 무렵부터 베트콩 정부와 군대의 요직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이들이 밀려나면서 베트콩 정부가 북베트남 정부와 다를 바 없게 되자 북베트남은 베트콩 정부와의 상의도 없이 남베트남 패망 2년 후 일방적 합병선언으로 통일을 완수했다. 북베트남의 강력한 재교육 정책에 항의했던 민족주의 계열 인사들은 재교육 캠프에 수용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민족주의 계열인사(베트콩 정부의 법무부 장관)는 결국 승리했음에도 [[보트 피플]]로 망명해 최종적으로 현재 [[프랑스]]에서 살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프랑스에서 발간한 자서전의 일부이며, 실제로 그 외에도 북베트남 정규군 출신으로 통일 후 남베트남에 대한 정책에 회의를 품고 망명해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직 북베트남 장교들도 유사한 증언을 한 바가 있다. 간단히 정리하면, 베트콩 정부(와 군대) 내의 공산주의자 계열(대개 북베트남 남파인원)들은 당연히 문제가 안 됐고, 자생적 민족주의자(반정부) 계열은 통일 이후 가치 하락과 반항 정도에 따라 요직에서 제외 혹은 재교육 캠프행이 결정됐고, 남베트남 출신들도 마찬가지였다고 보면 된다. 최후의 남베트남 총통이었던 [[즈엉반민]](Dương Văn Minh)[* 1963년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응오딘지엠]] 정권을 전복시킨 인물이기도 하다.]은 [[1980년대]] [[한국]]의 [[중학교]] [[도덕(교과)|도덕 교과서]]에서는[* 당시까지는 반공교육이 정식으로 도덕 교과에 포함되어 있었다. 반공교육은 [[1990년대]] 초~중반쯤에 끝났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고 나왔지만 실제로는 [[사이공 함락]] 후 간단한 조사를 거쳐 귀가시켰고, 후에 프랑스 망명을 허가해줬다. 그리고 나중에 즈엉반민이 해외에서 사망했을 때도 베트남 정부에서 유감을 표명했을 정도. 이는 즈엉반민의 경우 사이공 함락 당시 [[무조건 항복]]한 당사자라는 점, 그리고 해외 망명생활에서도 공산 베트남 정부에 대해 크게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하지도 않고, 비교적 조용히 살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베트남 현 정부에서도 크게 거슬려 하지는 않았다. 반면 남베트남계 이주민들은 즈엉반민을 곱게 보지 않는다. [[http://en.wikipedia.org/wiki/Duong_Van_Minh#Exile|#]] 남베트남 공군 총참모장 출신으로 [[부통령|부총통]]까지 역임했던 응우옌까오끼(Nguyễn Cao Kỳ)의 경우도 2004년 베트남 방문을 허가해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